3-2. '자기 원인'으로서의 신
우리가 익히 아는대로, 중세 스콜라 철학의 중심에는 언제나 신이 자리잡고 있었다. 철학을 신학의 시녀라고 여겼던 중세 스콜라 철학의 전통은 바로 그들의 신앙적인 태도이기도 했다. 그리고 그 신은 세상을 창조한 초월적인 존재였던 것이다.
하지만 스피노자는 이 모든 전통적인 견해들을 그 근저부터 뒤흔들어 놓고 있다. 그것도 스콜라 철학의 개념을 통해서, 그것도 그것을 엄밀하게 규정할 것을 요구하면서 그랬던 것이다. 그것은 마치 씨름의 기술을 구사하듯, 상대방의 힘을 이용해 상대를 넘어뜨리는 것이었기에, 스피노자는 우리를 더더욱 놀라게 만들고 있다. 그는 자신의 철학의 중심에 신을 위치시키고 기존의 전통적인 신 개념을 완전히 허무는 데까지 나아갔던 것이다.
스피노자에게서 '스스로 존재하는 신'이라는 규정은 스콜라 철학만이 아니라 데카르트의 철학까지도 넘어서는 결정적인 단서였다. 그가 보기에는 기존의 신학자들이나 철학자들은 신이 스스로 존재한다는 것이 함의하는 바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다. 신이 스스로 존재한다는 것은 신이 다른 어떤 것에 의존하여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그는 신을 '자기원인'이라고 말하고 있다.
스콜라 철학에서 '스스로 존재하는 신'이라는 규정은 "나는 스스로 존재하는 자이다"(출애굽기 3장 14절)라는 성서의 구절을 근거로 두고 있다. 전통적으로 중세 형이상학은 신의 본질과 실존이 일치한다고 보았다. 신은 단지 우연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필연적으로 존재해야 하기 때문이다. 유한하고 가변적인 양태들과 달리 신은 항상 존재하지 않으면 안된다. 따라서 이러한 규정은 신은 실존을 자신의 본질로 삼고 있으며, 신이 필연적으로 존재할 수 밖에 없다는 것을 의미하고 있다.
반면, 피조물은 '스스로' 존재할 수 없는 유한한 존재들이다. 이들은 가변적이며 언젠가는 자신의 실존을 잃을 수 밖에 없다. 따라서 신을 제외한 그 어떤 피조물들도 자신의 본질과 실존이 일치할 수 없게 된다. 즉, 피조물들은 실존을 자신의 본질로 삼지 못한다. 스피노자는 중세 형이상학의 전통을 따라 "신의 본질(essence)은 실존(existence)을 포함한다"(E Ⅰ. P7. Dem)고 말한다. 반면 피조물들은 스스로 존재할 수 없다. 따라서 '신에서 산출된 사물의 본질은 실존을 포함하지 않는다"(E Ⅰ. P24)
여기서 우리가 주목할 점은 스피노자가 신의 본성에 대해 강조하고 있는 부분이다. 그는 우리가 신에 대해 이러저러한 개념으로 규정하기 이전에 신의 본성에서 출발해야 한다고 단언하고 있다. 신은 실존을 자신의 본성으로 삼고 있는 존재이므로, 우리가 신의 존재를 규정하고자 할 때 다른 어떤 개념으로부터 출발하는 것은 부당하다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자기원인'인 신을 정의하기 위해서는 다른 어떤 개념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그는 이를 "자신 안에 있으면서 자신에 의해 이해되는 것"(E Ⅰ. D3)이라고 말한다.
스피노자가 보기에는 스콜라 철학자들이나 데카르트가 신에 대해 규정할 때, 그들은 신의 본성보다는 신에 대해 자신들이 상상하는 것을 앞세웠다. '전지전능', '영원함', '최고선' 등의 보편개념들이 그것이다. 그들은 신이 최고로 완전한 존재이므로 필연적으로 존재할 수 밖에 없다고 말한다. 왜냐하면 신이 만약 존재하지 않는다면 최고로 완전한 존재일 수 없게 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신은 필연적으로 존재한다. 하지만 스피노자는 신의 존재에 대한 이러한 방식의 증명이 신의 본성이 아닌 특성에 기반하고 있을 뿐이며, 인간적인 정서를 통해서 신을 묘사하는 것에 불과하다고 비판하고 있다.
따라서 스피노자는 신의 본성에서 직접 출발하고자 한다. 신이 선하다거나 전지전능하다는 식으로 추상 개념을 통해 매개적으로 신의 존재를 증명할 경우, 우리는 여전히 신의 본성과 인간의 본성을 혼동하게 될것이다. 또한 그러한 추상적 개념들은 신의 존재가 '무엇'인지 우리에게 아무 것도 알려주지 못할 것이다. 따라서 자기 원인으로서의 신은 다른 어떤 외적인 개념에 의해서 추상적으로 혹은 매개적으로 정의되어서는 안된다. 오히려 신의 본성으로부터 다른 개념들이 정의되어야 한다. 스피노자는 에티카 1부 정리1에서 정리10까지의 짤막한 과정을 통해 신이 '절대적으로' 무한하게 존재한다는 점을 논증한다. 자기 원인으로서의 실체는 무한히 다양한 속성을 통해 자신을 표현함으로써 절대적으로 무한하게 존재한다.
이제 스피노자는 절대적으로 무한하게 존재하는 신이 만물의 초월적 원인이 아니라 내재적 원인임을 밝혀낸다. 신은 결코 자연과 동떨어진 초월적인 존재일 수 없다. 위에서 살펴본대로, 신을 초월적인 존재로 가정할 때 신은 다른 외적 원인에 의해 제한될 수 밖에 없었다. 하지만 스피노자의 신 개념에 의해서 스콜라 철학의 불분명한 규정들은 새롭게 쇄신된다. 그것은 또한 초월적 존재로서의 신 개념이 인간적인 상상에 따라 요청된 것에 불과했음을 규명하는 것이기도 했다.
....여기서 잠깐, <에티카 >가 얼마나 골 때리는 책인지 제1부 신에 대하여 도입부를 옮겨 봅니다......
2. 같은 본성을 가진 다른 것에 의하여 한정될 수 있는 사물은 자신의 유(類) 안에서(in suo genere) 유한하다고 일컬어진다. 예컨대 어떤 물체는 우리가 항상 달리 더 큰 어떤 것을 생각하기 때문에 유한하다고 일컬어진다. 마찬가지로 사유는 다른 사유에 의하여 한정된다. 이에 반하여 물체는 사유에 의하여 한정되지 않으며, 사유도 물체에 의하여 한정되지 않는다.
3. 나는 실체란 자신 안에 있으며 자신에 의하여 생각되는 것이라고 이해한다. 즉 실체는 그것의 개념을 형성하기 위하여 다른 것의 개념을 필요로 하지 않는 것이다.
4. 나는 속성이란 지성이 실체에 관하여 실체의 본질을 구성하고 있다고 지각하는 것으로 이해한다.
5. 나는 양태(樣態) 를 실체의 변용(變容)으로, 또는 다른 것 안에 있으면서 다른 것에 의하여 생각되는 것으로 이해한다.
6. 나는 신을 절대적으로 무한한 존재, 즉 모든 것이 각각 영원하고 무한한 본질을 표현하는 무한한 속성으로 이루어진 실체로 이해한다.
해명 나는 자신의 유 안에서 무한하다고 말하기보다는 절대적으로 무한하다고 말한다. 왜냐하면 단지 자신의 유 안에서만 무 한하다면 어떤 것에 대해서도 우리는 무한한 속성을 부정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절대적으로 무한한 것의 본질에는, 본질은 표현하지만 어떠한 부정도 포함하지 않는 모든 것이 속한다.
7. 오직 자신의 본성의 필연성에 의해서만 존재하며, 자기 자신에 따라서만 행동하게끔 결정되는 것은 자유롭다고 한다. 그러나 다른 것에 의하여 특정하게 규정된 방식으로 존재하고 적용하도록 결정되는 것은 필연적이라거나 강제되었다고 한다.
8. 나는 존재가 영원한 것에 대한 단순한 정의에서 나온다고 생각하는 한, 영원성을 통하여 존재 자체를 이해한다.
해명 왜냐하면 그러한 존재는 사물의 본질과 마찬가지로 영원한 진리로 파악되며, 따라서 지속(持續)이나 시간으로는 설명될 수 없기 때문이다. 비록 우리가 지속을 처음과 끝을 가지지 않는 것으로 파악한다고 할지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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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연적인 세계를 이해할 때 인간은 자유로울 수 있다는 것>과
2009/12/16 19:25 [ ADDR : EDIT/ DEL : REPLY ]<물체는 사유에 의해 한정되지 않는다는 것..>.. 이내용은 유물론을 공부할때를 생각나게 하는 글이네요..
놀라운 것은,,그토록 오랫동안 이성으로 확인하기 어려운 <신>과 관념론이 유럽의 사상을 지배했다는 것입니다.
강좌를 들으면서 썼던 후기를 옮겨 본다
2009/12/17 01:54 [ ADDR : EDIT/ DEL : REPLY ](지금 다시 읽어보니 어수룩 하군!)
[에티카] 1부 "신에 대하여"를 읽을 생각을 하니 그저 막막해질 따름입니다
"신에 대하여'를 읽기 전에 "신"을 생각해 봅니다.
우주만물의 창조자로서의 신, 초월적 능력자로서의 신.
과학이 발전하면서 우주의 탄생, 생명의 탄생 기원이 속속 밝혀지고 있습니다
"뇌, 생각의 출현"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그 책에 보면 우주의 나이는 137억년
빅뱅후 우주가 탄생하였습니다
하나의 통일된 힘이 있었고, 이 하나의 힘이 빅뱅후 우주팽창과 더불어 순식간에 네가지 힘으로 분화됩니다
중력, 강력, 약력, 전자기력입니다
이중에서 지구의 생명 탄생을 가져오고 생각의 출현을 가능하게 한 것은 주로 전자기력, 전자기 상호작용이라고 합니다.
만약에 신이 있다면 그 신이란, 우주팽창을 가져 온 빅뱅의 순간, 통일된 하나의 힘, 이 우주를 움직이는 에너지의 근원, 그것의 다른 표현이라고 저는 생각하고 싶습니다.
그런 의미에서라면 "신이 모든것을 창조했다"라는 말은 맞다고 생각합니다 (아니, 그보다는 '모든것의 원인'이라는 말이 맞다)
350여년전 스피노자가 "신에 대하여"를 쓰면서
인간의 의식 속에 갇혀있는 "신"에 대한 패러다임을 바꾸자고 제안했던 것은 아닐까요?
다시 "뇌, 생각의 출현" 을 보면
대략 35억년전 지구상에 태초의 생명현상이 일어났다고 합니다
하나의 단세포에서 출발하여 2개 이상의 세포가 공생하기 시작하면서 여러 생명체가 생겨났습니다
우주의 힘의 작용에 의하여 우연히(?) 탄생된 생명체는 자신이 처한 환경에 적응하여 생존하기 위해서 진화를 거듭해 왔습니다
모든 생명체의 생존의지가 생명현상으로 나타납니다
모든 생명체 하나하나에 깃들어 있는 생존의지!
스피노자는 모든 생명체 안에 도도하게 흐르는 그 처절한(?)생명의지에서 "신"을 보았던 것이 아닐런지요
그가 "신에 대하여"로 에티카를 시작했던건 결국은 삶의 의지로 충만한 인간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싶었기 때문이었을 거라고 저 나름대로 단순무식하게 생각해 봅니다.
"바보야! 문제는 신이 아니고 인간이라니까" 라고 말하고 싶었던건 아닐까요^^
유물론을 공부하지는 않았지만, 저도 향미님 처럼 그 두 구절이 눈에 들어오네요.
2009/12/17 03:53 [ ADDR : EDIT/ DEL : REPLY ]'마찬가지로 사유는 다른 사유에 의하여 한정된다. 이에 반하여 물체는 사유에 의하여 한정되지 않으며, 사유도 물체에 의하여 한정되지 않는다.' - 당시 중세적 세계관을 가지고 있던 사람들에겐 꽤나 충격이었을 것 같네요. 스피노자가 유물론자로 받아들여졌을 수도 있겠구나 하는 생각도 들고...
'오직 자신의 본성의 필연성에 의해서만 존재하며, 자기 자신에 따라서만 행동하게끔 결정되는 것은 자유롭다고 한다.' - '진리를 알찌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라는 말처럼, 매력적인 말이군요.
개념으로서 신(창조된)이든 형상으로서 신(창조하는)이든 간에 그들(서구 찰학자들)의 사유가 신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것은 그들의 대지 탓인가? "신은 죽었다!"고 외치는 자는 물론 "신은 없다"는 사람또한 그가 '신의 땅-스스로를 신의 피조물이라고 '믿는' 자들이 사는 곳-'을 밟고 선 이상 그들의 사유와 언술이 제한을 받는 듯하다는 것이다.
2009/12/17 11:27 [ ADDR : EDIT/ DEL : REPLY ]글고 게다가 어쩌면 여기서 스피노자를 강론하는 사람의 '우주' 또한 신에게 구속되어 있을 수도 있다는 생각도 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