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내재성(immanence), 양태들의 바다
사람들은 신이 자연만물에 대해 초월적인 존재이듯이, 인간이라는 존재도 자연만물과는 다른 우월한 존재라고 여겨왔다. 특히 신이 인간을 창조할 때 다른 피조물과는 달리 인간에게 신의 본성을 부여함으로써 신과 유사하게 창조했다는 것이다. 인간은 신의 전지전능한 능력과도 흡사하게 지적인 능력을 소유했으며, 창조된 세상을 주관하는 신처럼 인간도 세계를 정복하고 지배하는 존재라고 여겨왔다. 하지만 스피노자라면 이를 인간들만의 자화자찬이라고 부르지 않았을까?
스피노자는 인간을 포함하여 모든 자연만물을 신의 변용(affection)이자 양태라고 보았다. 신이 자연과 별도로 따로 존재하지 않으므로, 모든 것들은 신 안에 있으며 신의 일부로써 이해된다. 자연만물들이 신의 변용이라면, 이 모든 것들은 신이 자의적으로 만들어낸 것이 아니라 신의 본성에 따라 필연적으로 존재하게 되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여기에서는 인간에게만 각별하게 신적인 능력이 부여되었다고 여길 수 있는 아무런 근거가 없음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신이 유독 인간에게만 그러한 능력을 부여했다는 생각은 다만 인간의 이기적인 발상에 불과한 것이 아닐까?
스피노자는 양태들에 대해서 신의 무한한 능력으로부터 설명하고 있다. 자연 안에 존재하는 것은 이미 신의 능력이 표현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반대로 존재하지 않는 것은 아무런 능력도 표현되지 않은 것이라 할 수 있다. 따라서 존재하는 모든 것들은 이미 신의 무한한 능력이 필연적으로 표현된 것이다. 그러므로 자연만물들이 생겨나는 것은 그것이 무(無)에서 유(有)로 갑자기 우연하게 탄생된 것이 아니다. 그것은 신의 무한한 능력에 따라 무수한 변용을 통해 표현된 것이다.
하지만 실체로서의 신과 양태가 본성상 서로 다르다는 점에 유의해야 한다. 신은 자기 원인으로서 어떠한 외적 원인에 의해서도 제한되거나 영향을 받지 않는다. 그런 점에서 신은 완전히 '능동적'인 존재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양태는 자기 원인이 아니다. 양태들은 서로 다른 양태에 의해 영향을 받고 영향을 주는 외적 원인의 관계 속에 놓여 있다. 따라서 양태는 부분적으로는 능동적이지만 부분적으로 수동적일 수 밖에 없다. 양태의 실존을 결정짓는 것은 바로 양태들 간의 외적인 관계들이다. 다른 양태와의 외적 관계가 상실된다면 그것은 더 이상 실존하기를 멈추게 될 것이다.
여기에 변용의 두번째 의미가 있다. 첫번째 의미에서 양태들은 신의 무한한 속성의 변용으로서 존재한다면, 두번째 의미에서 양태들은 양태들 간의 무한한 외적인 인과관계에 의해 규정된다. 나무를 예로 들어 살펴보자. 같은 나무라 하더라도 다른 양태들과의 관계에 따라 무수하게 변용하게 됨을 쉽게 알 수 있다. 나무가 가구공장과 만나면 의자와 옷장이 되고 불과 만나면 숯덩어리로 변하게 된다. 숯은 서예가의 손에 의해 먹으로 바귀게 되며, 땅에 묻히면 거름이 되어 토양을 비옥하게 만들어 준다. 따라서 양태들의 본질은 우선적으로는 신의 무한한 능력이 표현된 것이지만, 또한 그것은 다른 양태들과의 관계에 의해서 규정되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애초부터 의자나 숯의 이데아 같은 것이 별도로 존재하지 않는다. 만일 각각의 이데아들이 초월적인 세계로부터 현실 세계에 나타나게 된 것이라고 한다면, 우리는 나무의 이데아만이 아니라 의자, 티슈, 일회용 물수건 등의 이데아에 이르기까지 그때그때마다 각각의 이데아를 새롭게 가정하지 않을 수 없다. 하지만 양태들의 본질은 이처럼 초월적인 세계에서 미리 예정되어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들은 다만 양태들간의 관계에 따라 신의 무한한 능력이 표현된 것을 의미할 따름이다.
한편, 말, 사람 등의 보편 개념들은 그 자체로 양태의 본질을 말해주지 않는다. 그것은 무수한 사물들로부터 자극받은 여러 이미지들을 통해 한꺼번에 적용한 것에 불과하다. 따라서 사람들은 같은 사물에 대해서도 그들이 자극받은 대로 서로 다르게 상상하게 된다.
"예를 들면, 매우 빈번하게 인간의 자태를 경탄하면서 관찰한 사람은 인간이라는 명칭 아래서 직립한 자세의 동물로 이해한다. 이에 반하여 인간을 다르게 관찰하는데 습관이 된 사람들은 인간에 관하여 다른 공통된 이미지를 형성할 것이다. 즉, 인간을 웃을 수 있는 동물, 두 발을 가진 날개 없는 동물, 이성적 동물이라고 할 것이다"(E Ⅱ. P40. S1)
따라서 양태들에 대해 이러한 보편 개념을 적용할 경우, 우리는 양태들의 본질을 모호하게 인식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우리가 각각의 변용들에 유념한다면 그것은 각각의 양태들에 대한 보다 적합한 지식을 형성하게 된다. 이를테면, 동일한 말이라도 경주용 말과 짐을 나르는 말의 변용은 서로 일치하지 않는다. 변용능력에 따라 구분하자면, 경주용 말은 승용차에, 짐을 나르는 말은 수레에 더 가깝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동일한 의자라도 취조실의 의자와 식당 의자 역시 변용상 서로 다르다고 할 수 있다. 우리는 식당 의자가 그릇이나 수저 등과 보다 더 적합하게 연결됨을 알 수 있다. 또한 취조실의 의자는 경관의 수갑과 유치장이 보다 더 잘 연결된다.
이처럼 스피노자가 말하는 양태들은 보편 개념이 아니라, 각각의 변용에 따라 정의되는 개념이다. 다시 말해 양태들의 본질은 유(類)와 종차(種差)에 따른 보편 개념이나 이데아에 의해서가 아니라, 다른 양태들과의 관계에 따른 변용에 의해 정의되는 것이다. 이를 통해서 우리는 스피노자가 양태들에 대해 단지 명목적으로나 추상적으로 파악하기 보다는, 실제적이고 질적인 차이를 통해서 파악하고자 한다는 것을 볼 수 있다.
스피노자에게서 양태들은 신의 무한한 능력이 표현된 결과들이다. 그는 신의 무한한 능력이 무한히 다른 속성으로 표현된다고 말하고 있다.
"필연적으로 그리고 무한하게 존재하는 모든 양태들은, 필연적으로 신의 어떤 속성의 절대적인 본성에서 생기거나 아니면 필연적으로 무한하게 존재하는 일종의 양태적 변용으로 양태화한 어떤 속성에서 생기지 않으면 안된다"(E Ⅰ. P23)
그렇다면 여기서 다음과 같은 의문이 제기될 수 있을 것이다. 유한한 개체들이 단지 신의 변용일 뿐이라면, 양태들은 스스로 존재할 수 없으므로 양태들이 실존하는 것은 신의 능력에 의한 것임은 분명하다. 양태들이 갖는 능력은 신의 능력의 일부이지만, 이는 신의 능력이 우리들의 본질을 통해 펼쳐지는 한에서 신의 능력의 일부라고 말해지는 것이다. "인간의 능력은 인간의 현실적 본질을 통해 펼쳐지는 한에서, 신 또는 자연의 무한한 능력, 즉 그것의 본질의 일부이다."(E Ⅳ P4. Dem) 따라서 양태들은 자신들의 본질에 고유한 능력을 갖고 있다.스피노자에게 있어 자연은 인간의 처분만을 기다리는 수동적인 대상이 아니다. 자연은 무한한 방식으로 자신을 표현하며 무수한 양태들을 산출한다. 그리고 인간을 포함한 모든 자연만물들은 자연의 일부로써 함께 공존하고 있는 것이다. 또한 각각의 양태들은 그들간의 관계에 따라 생성하기도 하고 소멸되기도 하는 변용을 겪게 된다. 그렇다면 자연의 일부인 인간은 어떤 관계 안에서 살아가고 있으며, 어떠한 방식을 통해서 보다 풍요로운 삶으로 나아갈 수 있는가? 이것이 『에티카』전체에 걸쳐 흐르고 있는 스피노자의 문제의식이었으며, 책 제목이 다름 아닌 '윤리학'이었던 이유이기도 했다.
(이제서야 제 1강이 끝났군요ㅡ.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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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문 - 스피노자의 글에 '신'은 'God'으로 쓰여있나? 그러니까 스피노자는 유태의 유일신을 나타내는 God을 그의 신을 그리는데 그대로 썼는가? ---- 요것 좀 알아봐씀 조케따.
2009/12/21 12:27 [ ADDR : EDIT/ DEL : REPLY ]물론 이 글만 봐도 스피노자의 신은 분명 유태와 기독교의 신(히브리어로는 '엘로힘'이며 영문으로 God라고 쓰고 한자로는 천주 한글로는 하나님인)과 달라 보인다.
하지만 <양태들이 갖는 능력은 신의 능력의 일부이지만, 이는 신의 능력이 우리들의 본질을 통해 펼쳐지는 한에서 신의 능력의 일부라고 말해지는 것이다>라는 스피노자를 '무신론자'라고 할 수 있을까?
구약에서 '신'이 시대와 사람에 따라 그 모습을 다르게 보였고(나타났고) 구약시대의 '신'과 신약에서 '신', 그리고 삼위일체를 정립한 기독교에서 '신'의 '양태'가 다르듯이(다르게 그리듯이) 스피노자의 '신'도 이런 '다름'으로 봐야 할 것이 아닌가. 그렇다면 스피노자는 신을 부정한 무신론자가 아니라 기독교회와 다른 '신앙고백'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아무튼 나는 이 강의안 작성자가 목사여서 이 안에 "그의 스피노자'가 '유신론자'로 창조되고 있는 것 아닌가 하는 의심을 좀 한다.^^